『첫 여름, 완주』 — 멈춘 자리에서 피는 것들
도서 『첫 여름, 완주』 리뷰

📖 책 정보
첫 여름, 완주
- 저자: 김금희
- 출판사: 무제
- 분야: 한국소설, 장편소설
완주, 혹은 완주
'완주'라는 단어에는 두 개의 결이 있다.
공간의 이름이자, 끝까지 달려간다는 뜻.
다들 무엇을 향해 달리고 있는가.
열매는 자신의 삶을 달리다가, 숨이 턱 끝까지 차서 완주에 찾아온다.
이곳에서 숨고르기를 하고, 다시 달릴 힘을 얻어 자신의 삶을 완주해 나가는 것이 이 소설 전체의 플롯이다.
슬픔이 몰려왔고 몸이 아주 무거워졌다. 이래서 옆집 아이가 슬픔을 싫어하는구나. 무거운 몸으로는 춤은커녕 몸풀기도 할 수가 없으니까. — 68쪽
그런 무거움 속에서 열매를 일으켜 세운 건, 부엌에서 풍겨오는 된장찌개 냄새였다.
거창한 깨달음 같은 건 아니다.
그냥 누군가 옆에서 끓여주는 밥 한 끼.
일상의 온기가 조금씩 스며드는 것.
누군가의 안식, 또 누군가의 감옥
열매가 치료차 서울에 올라갔을 때, 잠적한 수미의 피해자들이 모인 술자리에 불려간다.
도움을 주고받던 사이였더라도 상황이 바뀌면 분노를 쏟아내는 사람들.
열매의 목소리를 잃게 만든, 악다구니 같은 서울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야기의 끝에서 드러나는 수미의 모습에 서울이라는 도시가 겹쳐 보인다.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속으로는 썩어 문드러져 가는 현대인의 민낯.
그렇다면 완주는 어떤 공간인가.
열매에게는 회복의 장소라지만 그렇다고 완벽한 곳은 아니다.
양미는 가정폭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그리고 꿈을 이루고자 이곳을 떠나고 싶어한다.
용운 엄마는 자식의 죽음이라는 과거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수미 엄마는 장의사와 매점을 함께 운영하며, 죽음과 삶의 경계가 공존하는 자리에서 순환하는 삶의 경주를 계속 내달린다.
누군가에게는 안식이고, 누군가에게는 벗어나야 할 곳.
그 상반된 모습이 공존하는 공간.
그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 또한 저마다의 경주를 달려나간다.
유효한 것들
어저귀는 7~8월, 여름에 꽃이 피는 한해살이풀이다.
한 해를 살고 소멸하는 존재.
그런데 이 소설은 그 이름을 마치 영원을 사는 존재에게 붙인다.
나는 삶이라는 말도 별로 안 좋아해요. 너무 덩어리 같고 물질적이고 그냥 그거보다 '유효'쯤이 살아 있는 상태를 설명하는 데 적당하지 않나? 인간, 나무 잎사귀, 물방울, 별 먼지까지 은은히 있다가 사라지는 모양을 다 담을 수 있잖아요. — 102쪽
탄생과 소멸, 이 순환을 '삶'과 '죽음'이 아닌 '유효함'과 '유효하지 않음'으로 바라보는 것.
한해살이풀도 각 개체는 한 해를 지나면 생명이 소멸하지만,
결국은 그 자리에서 또 새로운 싹을 내고, 희망찬 줄기를 뻗어내며, 꽃의 결실을 맺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다시 소멸한다. 아니, '유효하지 않은' 상태로 거듭난다.
완주에서 첫 여름을 맞이한 열매는, 그런 어저귀의 꽃을 마주한다.
순환 속에서 피어난 꽃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여름은 생장의 계절만이 아닌, 파괴의 계절이기도 하다.
완주에 상처를 남긴 수해 피해도 여름으로부터 왔고, 어저귀 또한 산불 속으로 사라진다.
피워 올리는 계절이 동시에 쓸어가는 계절이었다.
얼마나 많은 이별이 이 여름에 깃들어 있는 것일까. — 137쪽
그럼에도 한해살이풀은 같은 자리에서 다시 싹을 틔운다.
유효하지 않은 상태로 거듭났을 뿐, 끝난 것이 아니므로.
열매도 그렇게, 이 여름을 지나 다시 달릴 수 있게 되었다.
슬픈 얘기는 하지 말자
아이에 두닷 바도키 바리미 바드 나카리. 슬픈 얘기는 하지 말자. — 167쪽
양미의 친구들이 슬픈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꺼내던 약속이다.
슬픔을 모른 척하자는 게 아니라, 서로가 옆에 있으니까 굳이 슬픈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도 되는 것.
그 약속 자체가 이미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다는 증거와 같다.
각자의 경주를 달리면서, 서로의 숨을 고르게 해주는 존재가 되어준다는 것.
결국 나를 일으켜 세우는 것은 곁의 따뜻한 한 마디이기에.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된장찌개 냄새 같은 사람이면 좋겠다고, 문득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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