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리 가시리잇고 — 제주오름트레일런
발목을 제물로 바쳐 뷰를 얻다.

4시간쯤 짧게 눈을 붙인 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5시에 셔틀 타고,
5시 50분쯤 행사장 도착.
새벽엔 아직 춥더라.
필수장비라서 챙겨온 자켓 주섬주섬 꺼내 입고, 여기저기 사진 잔뜩 찍었음.
최애 브랜드 살로몬 배경으로도 많이 찍고, 자연 경관도 찍고.

요즘 만성 후경골건염이 있는 듯했다. 뛰려고 보니 계속 발목이 안 좋더니.
전날 웜업으로 가볍게 뛴 5키로 이후에 잔잔한 통증이 있었는데, 그대로 아프더라.
아, 이대로 뛰면 분명히 발목 아플 텐데.
결국 스타트부터 발목이 아프기 시작했다.
31키로 정도를 발목이 아픈 상태로 참아가며 뜀.
아픈 상태로 뛰려니까 너무 재미가 없더라. 이걸 왜 하고 있나 싶고.
뛰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들지. 인생은 등산 같다고. 오르막 내리막 반복이니까.
근데 인생은 원점회귀가 아니잖아. 내리막만 걷다 끝날 수도 있고, 오르막만 오르다 끝을 못 보고 끝날 수도 있고.
이런 트런 대회들도 원점회귀 코스만 있는 건 아니듯이.

아무튼 그럼에도 도전은 숭고한 거라 생각함.
그래서 그런지, 도전이 아닌 것은 나에게 내적 의미를 점점 잃어가는 것 같다.
어느 순간부터 객관적인 기록에 집착하게 되더라.
클라이밍에 클태기가 온 것도 객관적인 성적표가 없어서라고 생각함.
로드 러닝은 정해진 키로수 안에서 객관적인 숫자로 나의 현 위치가 파악되는데, 그렇지 않은 다른 도전들은... 뭐랄까.
같은 결로 더 나아가자면, 어느 순간부터 보여지기 위한 노력을 추구하고 있는 거 같기도.
객관적으로 누가 봐도 이해할 수 있는 성과를 내야만, 그걸 도전하며 다른 사람들의 '와 대단하다'를 듣고 싶어서 이런 노력들을 하는 걸지도.
아무튼 그런 마음으로 이번 대회를 뛰다 보니 시간이 전혀 상관없는 거라.
걍 완주만 하면 되는 거지 뭐, 하면서 천천히 뛰었다.
지나가다 쥐 나신 분들 쥐도 풀어드리면서. 기록 같은 거 전혀 신경 안 쓰고.
CP에선 뷔페 온 사람처럼 이거저거 다 먹어보면서 말이지.
그랬더니 오히려 더 즐겁게 뛰었던 거 같기도 하고. 거지같은 발목 통증만 빼고.

그리고 풍경. 날씨가 좋아서 그런가 뷰가 미쳤었지.
오름에 올라서 보는 풍경이 다 달랐다. 저 멀리 한라산 백록담까지 보였는데, 난 백록담을 볼 때마다 한라산에 난 뾰루지 같더라.
가시리 동네를 뛰는 거였는데, 뛰는 내내 가시리 가시리잇고, 이게 계속 떠오르더라 ㅋㅋ.
바닷가도 아닌데 거대한 바람개비들이 잔뜩 서 있는 것도 신기했고. 초여름이라 그런가 거대 마시멜로들도 풍년이었지.
저쪽 봉우리나 평야를 뛰어가는 사람들이 보일 때가 있었는데, 그게 또 낭만 있더라. 한 줄로, 각자의 생각을 메고 자연을 달리는 사람들.

뭔가 결론을 내려야 할 것 같은데. 모르겠다. 발목이나 빨리 나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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