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 2025년, '척'하던 1년의 기록
2025년 회고
이미 2월달이나 된 현 시점에 25년 회고를 적는 게 아이러니하지만, 원래도 회고를 늦게 쓰는 게으름뱅이였으니 그러려니 하자.
흑백요리사2 이야기 결승이 공개된 지 벌써 3주나 지났다.
가장 감명 깊었던 건 조림을 '잘하는 척'하던 최강록의 이야기.
정말 눈물 펑펑 쏟으며 보았다.
최강록의 이야기를 발판 삼아, 지난 1년간 나는 어떤 '척'을 하며 살아왔는지 되돌아본다.
현재 일에 만족하는 척
작년 초, 부모님의 학원에서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사실 취준하며 하려던 알바 같은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원래는 기존 자료를 DB화하고, 홈페이지를 만들고… 그런 개발자스러운 미션을 받았었다.
그런데 점점 맡겨지는 게 많아졌다. 교재 편집, 국어·논술 문제 출제, 문서 디자인, 회의록 정리, 각종 엑셀 작업, 약간의 회계 처리, 인사 업무, 하다못해 영상 촬영과 간단한 편집까지.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이 일들이 과연 내 커리어에 도움이 되나? 전문성이 있는 일들인가? 내가 이 학원을 떠나더라도, 이 경험이 내 인생에 뭔가를 남겨줄 수 있는가?
아니, 그걸 차치하고서라도 — 이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학원이 발전하고 있나?
나는 나대로 짬만 맞고, 학원의 전체적인 생산성은 딱히 나아진 게 없는 건 아닐까?
페이는 페이대로 못 받았다. 열정도 없는 열정페이. 아무래도 가족 경영이란 그런 거다.
사실 그보다도, 대충 매출액과 인건비, 고정지출 등 돈이 어떻게 돌고 있는지 아니까… 더 받을 수 없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학원을 물려받는다는 이야기를 하며 뭐라도 있어 보이려 했다.
어차피 사람들은 내가 얼마를 받는지 모르니까. 대치동에 학원이 있고, 학생이 몇 명이고 — 이런 얘기를 하면 다들 꽤 부러운 눈치였다.
그럭저럭 일하고, 그럭저럭 놀면서 1년을 보냈다.
되돌아보니 그 시간이 미래를 오히려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개발 잘하는 척
작년 상반기, 항해를 했다.
이렇게 쓰니까 되게 멋들어져 보인다. 이러니까 이름을 이렇게 지었겠지.
프론트엔드 개발자로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항상 이런 곳에서는 첫인상이 중요하다. 기선제압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첫 3주간 매일 새벽까지 코드를 깎았다.
그렇게 3주 연속 BP를 받았고, 잘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모이기 시작했다.
그 사람들에게 꿀리지 않기 위해 계속 잘하는 척을 했다.
뭐 물어보면 다 아는 척. "아, 그거 들어봤어요~"
물론 다 들어본 이야기이긴 했다. 딱 거기까지. 더 깊이 있는 학습 없이 "~라고 하던데요"로 버텼다.
그렇게 얼레벌레 10주를 마치고, 이후에는 개발자들끼리 모여서 대화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거기서도 책 한 권 읽고 'AI 잘 아는 척', '요즘 개발 소식 잘 아는 척'을 해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실전 경험은 쌓이지 않았고, 하반기로 갈수록 '개발 잘하는 척'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때 그냥 꾸준히 잘하던 사람들은 더 좋은 곳으로 이직하고, 성장해 나가는 소식이 들려오는데.
나는 그저 한때 개발 잘하는 척 하던 놈으로, 어딘가에 멈춰 서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개발자가 아니니까'라는 핑계를 대며.
리더십 있는 척
모임을 기획하고, 어떤 모임의 장이 되고, 사람들을 모으는 것 — 그게 나의 장기라고 생각해왔다.
그동안 그런 모습을 보이며 살아왔으니까.
하지만 지난 1년, 일의 자리, 책임의 자리에서 깨달았다.
그동안 사람들과 일하는 것이 즐겁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반대였다.
사람을 다루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사람에 대한, 그리고 사업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내가 그동안 리더십이 있는 척할 수 있었던 건, 책임감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정말 나의 선택이 누군가의 이해득실에 크게 관여하게 될 때,
나와 다른 뜻을 품은 사람들과 같은 목표를 향해 달려가야 할 때,
나의 무력함과 무기력함이 발가벗겨지듯 드러나는 자리.
리더의 자리란, 그런 자리였다.
이 겨울을 지나며
2월 4일, 벌써 입춘이다.
지난 한 해를 보내고, 올 겨울도 다 지나가고 있다.
아마 인생에서 가장 큰 변곡점 중 하나를 지나고 있는 겨울이 아닐까 싶다.
내가 세운 올 한 해의 다짐 중에 이런 게 있다.
'내뱉은 말은 무조건 지키는 한 해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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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일에 정말 만족해보려 한다.
요즘 AI를 활용한 다양한 툴들을 직접 만들어서, 학원 현장에 적용해보고 있다. 실제로 생산성이 바뀌는 경험을 해보고 싶어서다. -
개발을 잘하는 사람이 되어보려 한다.
나는 '개발을 잘한다'는 것이 '개발로 비즈니스적 가치를 가장 크게 끌어올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손으로 만든 것들이 실제 가치를 만들어내는 경험을 위해, 1년간 부딪혀볼 생각이다. -
리더십을 다시 찾아보려 한다.
'일의 감각' 독후감에도 적었듯이, 단순히 '리더십'이 아닌 우선 '오너십'을 되찾고 싶다. 내 일을 사랑하고, 책임을 지고, 그 무게 앞에서 도망치지 않는 사람.
조림을 잘하는 척하던 조림인간 최강록은, 결국 대한민국 최고의 셰프가 되었다.
이런저런 척하던 핑계인간 유한별은 — 올해, '척'을 벗고 진짜가 되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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