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表紙)와 표지(標識)
문득 든 '표지'에 대한 생각
책을 집어들게 하는 건 표지(表紙)다.
하지만 끝까지 읽게 만드는 건 겉표지가 아니라, 중간중간 놓인 표지(標識)들이다.
챕터의 제목, 페이지 위의 숫자, 점점 두꺼워지는 왼쪽 페이지.
그런 작은 표지들이 없으면 금방 지치고, 완독하지 못한다.
러닝에서도 비슷한 걸 느낀다.
대회에서 평소보다 더 많이 뛰면서도 버틸 수 있는 건, 매 킬로마다 적힌 현 위치, 2.5킬로마다 놓인 급수대, 몇 킬로마다 자리 잡은 응원단. 그 표지(標識)들 덕분이다.
저기까지만, 한 번만 넘기자. 그러다 보면 금세 마지막 장에 도달해 있다.
인간관계도 그렇지 않을까.
우리는 겉표지(表紙)를 보고 사람을 향한 마음을 집어든다.
그러나 사람 간의 관계는 늘 초행길이기에, 그 과정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마음의 표지(標識)가 필요하다.
별일 없는 날 건네는 안부 한 줄. 상대가 무심코 꺼낸 이야기를 기억해두는 것. 함께 밥을 먹으며 나누는 시시한 대화.
그런 작은 것들이 관계 위에 킬로미터 표지판처럼 박혀서, '우리 아직 여기까지 왔고, 아직 함께 가고 있다'는 걸 알려준다.
그걸 어떻게 더 잘 표시할 수 있을까.
누군가가 나를 지쳐 떠나지 않도록.
내가 누군가를 지쳐 놓아버리지 않도록.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comments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