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셉 수업』 — 남길 것과 버릴 것
도서 『컨셉수업』 리뷰

📖 책 정보
컨셉 수업
- 저자: 호소다 다카히로
- 출판사: 알에이치코리아
- 분야: 경제경영, 마케팅전략
오랜만에 글을 적는다.
한동안 일하는 내내 AI랑 대화하는 시간이 길었다.
프로젝트마다 에이전트를 하나씩 붙여놨더니 열 때마다 정보가 쏟아졌다.
읽기 편하게 정리는 잘 돼 있는데, 다 읽고 나면 자꾸 나한테 선택을 요구한다.
이걸 할지 저걸 할지, 이 방향이 맞는지.
하루에 수십번씩 그러고 있으면 저녁엔 아무것도 고르기 싫어진다.
그래서 책이 읽고 싶었다.
근데 정보성 도서를 펴니까 이것도 마찬가지더라.
읽으면서 무언가를 판단해야 하고, 더 나아가 고민하고 결정해야 하는 일도 빈번하고.
소설이 읽고 싶어졌다.
소설은 나한테 뭘 요구하지 않으니까.
주인공이 느끼는 대로 좀 따라가고, 작가가 생각하는 대로 좀 얹혀 있어도 되고.
그게 필요했다.
근데 그러려면 읽던 책부터 끝내야 했다.
그래서 이 책을 미루고 미루다 겨우 덮었고, 덮고 나서는 독후감 쓰기 귀찮아서 또 미뤘다.
그렇게 미룬 걸 지금에서야 적는다.
책 정보나 통찰 같은 걸 기대하고 들어온 분이 있다면 미안하다.
여기부턴 내가 기억해두고 싶은 것들만 적고, 책 내용은 더 다루지 않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책은 그동안 꽤 읽었다.
그래서 컨셉이 왜 필요한지, 명료하게 정리하는 게 왜 중요한지 같은 이야기는 진작에 납득한 상태로 폈다.
새로 안 건 별로 없었고, 대신 나중에 꺼내 쓸 만해 보이는 것들만 몇 개 끄적여보았다.
5GB짜리 MP3 플레이어와 주머니 속의 1000곡.
같은 사실을 말하는 두 문장인데 완전히 다른 물건처럼 들린다. 5GB를 사용자 쪽에서 다시 말하면 1000곡이 들어간다는 뜻이고, MP3라는 기술을 쉽게 풀면 주머니에 들어가는 크기라는 뜻이다. 둘을 가르는 건 사양이 아니라 어느 쪽에서 말하느냐다. 애플은 저 한 문장을 설계도처럼 썼다고 한다.
마케팅용으로 쓸 땐 200~300자.
고객 눈높이로 쓰고, 안에서만 통하는 말이나 어려운 단어는 피하고, 멋진 카피에 욕심내지 말고 기능적으로. 앞의 1000곡이랑 같은 얘기다.
여덟 가지 재구성 질문.
부분 대신 전체로, 객관 대신 주관으로, 현실 대신 이상으로, 명사 대신 동사로, 창조 대신 파괴로, 수단 대신 목적으로, 이기 대신 이타로, 정해진 것 대신 자유롭게. 하나의 대상을 여덟 방향에서 다시 물어보는 목록이다. 이 책에서 가장 도구 같은 부분.
한 장으로 정리하기.
인사이트, 컨셉, 베네핏이 뼈대. 스케치는 물건이 아니라 사람을 중심으로 그린다. 베네핏은 항상 근거가 되는 사실과 세트로 적는다.
가치는 몇 줄로.
간단하게, 명확하게, 기억하기 쉽게. 글자 수를 줄이고, 구체적으로 쓰고, 리듬을 신경 쓴다. 매일 판단 기준으로 쓸 말이니까 못 외우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뜻이겠지.
혼자 읽고 만족하는 시가 되면 안 된다.
컨셉은 계속 목표와 대조하면서 검증해야 한다고 한다. 잘 쓴 문장인지가 아니라 실제로 뭘 굴러가게 하는 문장인지를 봐야 한다는 소리다.
그 외에 미션과 비전을 시간축에 놓고 구분하는 이야기도 있었다. 미션은 창업부터 끝까지 가는 거고 비전은 이뤄지는 순간 사라진다는 것. 그럴듯한데 당장 쓸 데는 없어 보여서 일단 적어만 뒀다.
예전 같았으면 읽으면서 어디에 적용할지부터 생각했을 거다.
학원 소개 문구를 이걸로 다시 써봐야지, 수업 설계할 때 여덟 개 질문을 돌려봐야지.
근데 이번엔 그런 마음이 안 생기더라.
정확히는 그럴 의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대신 든 생각은 이걸 스킬로 만들어서 AI한테 먹여두면 되겠다는 거였다.
나중에 뭘 기획할 때 알아서 저 질문들을 돌려주면 좋겠다고.
컨셉이 왜 중요한지는 이미 백분 공감하고 있고, 그럼 남는 건 방법론인데, 방법론을 굴리는 데는 나보다 나은 도구가 있잖나.
그럼 그 도구를 쓰는 게 맞지.
게을러서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니, 게으른 게 맞는데 그게 틀린 판단은 아닌 것 같다.
다만 이렇게 마무리하기엔 아쉬우니, 책 내용 하나쯤은 되짚어 보고 가자.
책에 어느 증권사 이야기가 나온다.
조직의 가치를 다시 정할 때 남겨야 할 행동부터 논의했다는 것.
창업 이래로 고객을 먼저 생각해온 자부심이 있으니 그건 어떤 시대가 와도 바뀌면 안 된다고 봤고, 오히려 거래가 다 디지털로 넘어간 시대니까 시간을 들여 신뢰를 쌓는 일이나 직접 찾아가는 일이 더 값어치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나왔다고 한다.
스타벅스가 흡연자를 손님에서 뺀 이야기도 비슷하다.
90년대면 흡연자가 지금보다 훨씬 많았을 텐데, 카페 올 사람의 절반 이상을 처음부터 없는 셈 쳤다.
모두를 기쁘게 하려다 아무도 못 기쁘게 할 바에야.
남길 걸 고르고 버릴 걸 고르는 일.
이것만큼은 AI에게 맡길 수 없다.
질문은 대신 던져줄 수 있고 문장도 대신 다듬어줄 수 있는데, 뭘 버릴지는 결국 내가 정해야 하잖나.
앞으로 내 인생을 꾸리는 데도, 내가 속한 학원을 꾸리는 데도 이 책이 좀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언젠가는 앉아서 남길 것과 버릴 것을 정해야 할 텐데, 그건 또 미루고 있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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